본문 바로가기

퇴근 후, 색연필 드로잉 · 엘리 | 위로받는 시간

책 이야기 - 2022. 3. 23. 00:30 by 사재사
반응형

이 책은 크기와 모양부터 조금 독특한데 긴 가로 사각형 모양이다. 구성도 다른 드로잉 책과는 다르게 파트마다 사진과 짧은 멘트가 들어가 있는데, 제목에도 있듯이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받는 따뜻한 위로 같았다. 이 위로의 메시지를 읽고 시작하는 색연필 드로잉이라니. 이 사랑스러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아니었던 걸까. 아직 다 그려보진 못했지만 글만 읽어도 힐링이 되는 책이다. 유난히 깊게 남아있는 몇 부분만 다시 떠올려 볼까 한다.

 

 


 

Drawing 02 · 커피 a coffee

「그림을 그리다 실수를 하거나

내가 생각한 방향과 다르게 그려져 갑자기 의욕이 떨어질 때,

책상 앞을 떠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해요.

커피를 마시는 짧은 시간 동안은 그림과 상관없는 다른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.

물리적인 거리만큼 마음속에서도 거리가 생길 수 있도록요. -31page 中」

 

이 파트는 사실 예전에 그림을 전공했을 때가 떠올라 마음에 더 남았다. 내 경우엔 그리다 의욕이 떨어지면 왜 또 안 그려지냐며 자책하며 힘들어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.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. 혹은 내가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일 수 있었더라면. 20대가 많이 떠올랐었다.

 

 

Drawing 05 · 향기 fragrance

「저는 소중한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그날그날 일기로 기록을 해요.

그리고 또 한 가지, 향기로 순간을 기록해요.

이렇게 향기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들이 참 아늑하고 좋아서

이제는 의식적으로 소중한 순간들을 향기에 담고 있어요. -51page 中」

 

난 유난히 후각이 예민한 편이다. 누구보다 먼저 내 주위로 침입한 향을 맡고 주변을 탐색한다.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서 과거의 사람과 같은 향기를 맡게 되면 그때의 과거가 떠오르고, 반대로 힘들어서 투정 부리고 싶을 땐 엄마가 생각나고, 가장 안정감을 느꼈을 때 맡을 수 있었던 엄마 냄새를 떠올리기도 한다. 향기로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픈 기억을 떠 밀어보내기도 한다. 그럼 다시 나에게 힘을 주는 향을 찾으러 간다. 지금은 우리 집 냄새, 남편 냄새.

 

 

Drawing 12 · 청소 cleaning

「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가장 쉽게 실천해볼 수 있는 것은 청소예요.

호텔에서 머무를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,

집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.

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반짝반짝 광을 내면서

내가 나를 정성스럽게 대접해보는 거예요. -95page 中」

 

요즘 들어 청소로 정말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다. 내가 집을 아끼니 집도 나를 아끼고 소중히 대하는 느낌? 정말로 집이 인격을 가지고 그럴 린 없지만 청소하는 행위로, 그 결과물로 위로받고 응원받고 그렇게 지내고 있다.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. 이사 오게 되면서 짐을 많이 버렸고, 정리하는 법도 찾아보며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더니 나의 생각도, 마음가짐도, 습관도 조금씩 조금씩 좋게 변하더라. 청소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고 싶어졌다.

 

 

Drawing 20 · 책상 on the desk

「그림 그리는 일은 직업이기도 하지만, 취미이기도 해요.

열심히, 잘하기 위해 애쓴 시간이 있었다면

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꼭 필요해요. -157page 中

 

나는 뭐든 열심히 해야 마음이 놓였다.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 있을 수 없었다. 하지만 내 몸이 아프니 저절로 '적당히'라는 걸 하게 되더라. 정말 꼭 필요하다.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. 육아는 내가 포기를 할 수 없고 무시도 할 수 없다.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잘하지 못하더라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. 결과물은 없는데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. 육아처럼 잘하고 있는데도 잘하는 것 같지 않는 분야가 있을 것이다. 가끔은 좀 덜 신경 써도 될 텐데 매사에 왜 그렇게 완벽하게 하려고 혼자 발버둥 치다 지쳐버리는지. 조금은 편하게 해도 괜찮다며 남편이 토닥인다.

 

퇴근 후, 색연필 드로잉 155page

 

 


 

 

엘리 작가는 그림도 글도 잔잔하니, 조용하게 다정한 위로를 해준다. 책이라는 건 정말 굉장하다.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.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백만장자, 억만장자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, 자수성가 한 사람들의 노하우도 알게 되며, 내일도 힘내서 살아가라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. 일주일에 한 권씩만 읽었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있었겠지.

 

책을 읽지는 않고 사 모으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. 아마도 스트레스를 받고 돈을 쓰고 싶었던 것 같은데, 그걸 책 사는 걸로 풀다니 새삼스럽게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. 너무 건전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거 아니니.

 

엘리 작가가 신간을 내주면 참 좋겠지만, 새로운 작가의 위로의 말이 듣고 싶기도 하다.

 

 

퇴근 후, 색연필 드로잉
엘리 지음

2020년 7월 15일 발행

 

반응형